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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소통

위험한 인물 노무현


위험한 인물 노무현
(서프라이즈 / 초모룽마 / 2010-03-13)


고병권이 말했다. 위대한 책들은 세상을 위험하게 만든다고.

“세상을 한 번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은 책이 어떻게 위대한 책일 수 있겠는가? 니체가 말했다. ‘불을 품지 않은 책은 불로써 심판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에서 불태워진 책들은 대부분 ‘불을 품은 책들’이었다. 그 책들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신약 복음서는 예수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세대를 거듭해갈수록 복음서들에서 예수의 모습은 진짜에서 멀어져 갔다. 대신 신성, 기적, 후광이 덧칠해졌다. 기독교 초기, 복음서는 오직 필사로만 후대에 전해졌는데, 필사자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은 쏙 빼는 한편, 이상적인 예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가필, 작문까지 서슴지 않았다. 진실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문이 만들어진 것이다.

가령, 마가복음에서 나병환자 하나가 병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자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깨끗이 낫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일부 초기 사본(원본은 없어졌다)에는 이 구절이 ‘예수께서 노하시어’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이 후자의 표현이 오리지날이다. 이렇게 예수는 점차 인간에서 신으로 변해갔다. 인자하고 온유하며 원수에게도 사랑을 베푸시는 선한 목자. 이런 인물은 위험스런 존재인가?

필사 사본, 또 그 사본에 사본이 거듭 반복되어 덧씌워진 포장들을 확 걷어내고 복음서 원본을 복원해냈다고 하자. 복음서 곳곳에 숨겨진 듯 드러난 예수의 모습을 조합해보면, 틀림없이 예수는 다음과 같은 인물일 거다.

위험한 교사

예루살렘 성전에 진치고 있던 환전상들의 좌판을 뒤엎는 과격한 원칙주의자,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왔다는 유대 랍비, 죽음 앞에서는 솔직하게 고뇌하고, 또 울고 웃을 줄 아는 인간이지만 원칙 앞에서는 어떤 타협도 불가능한 자, 뒤틀린 세상에 분노하며 새 세상을 꿈꾸는 자. 보면, 마르크스가 맑시스트가 아니듯, 예수는 예수쟁이가 아니다!

예수는, 따라서, 돈과 권력 맛에 흠뻑 취한 대사제장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에게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다. 왜 그가 유대인들에 죽임을 당했겠는가. 그가 불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경기지사 출마를 선언하자 수구들과 진보연들 둘 다 두려워하며 일제히 거품을 문다. 공포에 떤다. 왜? 그는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떡찰이 왜 아픈 사람을 위협하면서까지 한명숙을 엮으려고 했겠는가. 자칫하다간 개 쪽팔림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한명숙은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유시민과 한명숙은 왜 위험한가? 물론 노무현 때문이다.

노무현은 왜 지금도 위험한 인물인가? 그의 죽음으로, 그것을 통해, 조중동과 최성심(최장집-성한용-심상정을 표현하는 신조어. 좌꼴들과 동의어다) 들이 그에게 덧씌웠던 것들이 벗겨 나갔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인간적인 모습이 밝혀졌기 때문이 아니다. 새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진정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지양하고자 했던 낡은 것들의 실상을 폭로해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저들이 왜 유시민과 한명숙에 질겁하는가? 노무현이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위험’한 인물과 ‘위협’하는 자들은 확연히 구별된다. 후자의 대표적인 게 가카다. 위협적인 인물은 어떤 특징을 갖는가? 대가 또는 이권을 바라면서, 위협한다는 거다. 핵무기는 위험한 게 아니다. 핵은 위협을 통해 대가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권을 위한 거래용일 뿐이다. 여기서 이권은 권력의 사적 소유를 뜻한다.

근육질 부시가 세계를 위협했던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함이 아니다. 부시가 원했던 것은 세계 이권이다. 가카가 4대강과 세종시로 국민들을 위협하는 것은, 권력을 사적으로 소유하려고 하기(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카와 부시가 궁합이 잘 맞았던 이유가 바로 밝혀졌다.

반면, 위험한 인물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들은 이권에는 전혀 관심 없다. 예수가 이권에 관심 있었나? 그가 원했던 것은 각자가 하느님처럼 사는 세상이었을 거다. 또 다른 위험인물 노무현이 원했던 새 세상은? 권력의 사회화다. 그는 권력 자체를 놓아버린 게 - 일부 노빠들까지 이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 아니라, 권력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자 한 거다.

소외된 권력을 그 주인인 시민들에게 되돌려주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존재와 힘을 알게 해주는 것(일단 그것을 알게 되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권력은 사회 전체에 속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것.

권력을 사적으로 쥔 자들 - 가카들, 떡찰들 - 에게 이런 노무현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가. 위협하는 자들은 위험한 인물들을 무서워한다. 위험한 인물들은 결코 이권을 놓고 거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위협이 통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신은 분명히 도래해 있다. 이미 와 있지만 가카들이 하도 설치는 바람에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가카들이 현재에 달라붙은 과거라면 노무현 정신은 현재에 미래의 불을 품고 있다. 노무현 정신은 어쩌면,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가는 운동’일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든, 노무현 정신(요즘 지나개나 이런 말을 쓴다는 데 그러지 말자 쫌)은 매우 위험하다. 세계를 뒤흔든다. 세상을 뒤흔들지 못하는 책이 위대하지 않듯, 세계를 뒤흔들지 못하는 자, 위대하지 않다.


노년의 웰링턴은 19세기 중반 새로 발명된 철도 탓에 혁명 내지 저항 정신이 여기저기 퍼지게 될 것이라며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떡찰이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희대의 코미디를 연출하면서, 노무현의 조사를 낭독한 한명숙을 흠집 내려는 이유도 이런 공포 때문일 거다.

떡찰들은 살아남은 노무현 정신을 통해 (아직 구체적 형태를 드러내지 않았으나 위험한 사람들일 게 분명한) 어떤 공통된 사람들이 추출되어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을 거다. 그들은 바로 깨어있는 시민들이다.

 

초모룽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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