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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소통

좋은 일, 나쁜 일, 이상한 일 - 해질녘바람

좋은 일, 나쁜 일, 이상한 일
(서프라이즈 / 해질녘바람 / 2008-12-18)


 

좋은 일

 

그야말로 딱 10년 전으로 돌아왔다. 아니 그보다 더 마이너스로 오버를 했다. 하지만 한 번 겪어봤던 어려움이라 그런지 마음은 그때처럼 공황은 아니다. 되려 너무도 차갑게 가라앉아있고 난 묵묵히 도시락을 싸서 출근을 한다.

술 먹을 자리가 현저히 줄어드니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들놈과 드물지만 이런저런 농도 주고받는다. 직원들과 빙 둘러앉아 도시락을 까먹으며 서로의 반찬을 나눠 먹고 서로 국도 챙겨준다. 살갑다.

되도록이면 걷고 되도록이면 아끼며 그렇게 해보자고 마음만 먹었던 'Slow Life'를 살고 있다. 서로 나누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배려하며 그렇게 모두가 가난하게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썩어서 버리던 음식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꼭 필요한 것만 집안에 들여놓는다. 새 옷 사기는 되도록 삼가고 '그 옷 어딨더라'를 되뇌며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꺼내 입는다. 이른바 생활거품이 꺼지고 있다. 좋은 일이다.


나쁜 일

 

어른이 안 보인다. 사라져 버린 건가.

어른은 먼발치를 먼저 보는 사람이다. 바로 코앞의 하루하루와 일을 쳐내기에 급급한 어린 사람들을 위해 먼저 먼발치를 바라보고 길을 잡아주고 단단히 준비를 시키는 사람들이 바로 어른이다.

그래서 어린 사람이 분명히 잘못된 길을 향해 코앞만 보고 달려나갈 때 호통이라도 쳐서 정신 바짝 차리게 하여 어린 사람을 우뚝 서게 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 한 번쯤은 먼발치를 바라보게끔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그 어른이 없다. 예순일곱 먹었다고 어른이 아니고 서른이라고 어린 사람이 아니다.

나이만 처드실 대로 처드신 13인의 아해가 질주해서 막다른 골목길로 나와 우리를 끌고 들어가는데도 그 어디에도 어른의 호통은 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식은 밥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기듯 호통을 주워 삼키고 있는가 보다.

아이들이 누더기 역사책을 들고 5천년을 방황한다. 그렇잖아도 왜놈들이 쇠막대로 땅의 기운을 메워 버린 지 언제라고 이젠 이 땅을 갈기갈기 찢어 개들에게 나눠준단다. 10만원을 빼앗겨도 허허 속을 달래기만 하는 사람들에겐 17만 5천원을 강탈해 가고 3만원만 없어져도 길길이 뛰며 육법전서 들이미는 사람들한텐 36만 4천원 되돌려 드린단다. 나중에야 삼수갑산을 갈망정 자신이 자리 잡고 있는 동안엔 광 좀 내겠다고 한다. 에라, 쥐 목에 진주 목걸이다.

전당포에 저당 잡혀버린 미래를 어쩌란 말인가. 어른이 사라진, 아니 어른이 존재할 수 없는 이 꼬락서니는 진정 나쁜 일이다.


이상한 일

조용하다. 신기하게도 너무 조용하다. 서슬 퍼런 바람에 모두들 움츠리고 있어서인가. 아니 그건 아니지. 그건 공화국의 시민들을 몰라도 한참 몰라서 하는 소리지. 모두들 지쳐 쓰러져 나 몰라라 하는 중인가. 일견 그럴 법해 보이지만 불과 몇 개월 전의 그 뜨거운 불꽃들을 떠올리면 그도 지나친 과장인 게다. 그럼 뭘까. 이 폭풍 전 고요 같은 상황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온 공화국의 시민들은 이미 새로운 유희문명의 시민들과 조우를 하고 그들과의 화학적 결합에 도달했다. 이제 공화국의 시민들은 논리와 열정과 끝없는 희생만으로 저 견고한 철갑을 뚫어내는 일은 너무도 소모적이라는데 이심전심으로 합의를 했다. 끝을 봐야 하는 거다.

밑바닥.

경제도 정치도 사회도 시민들 자신도 밑바닥을 봐야 한다는 굉장히 무서운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한나라당의 괴변과 자뻑논리와 안하무인증은 아직 밑바닥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밑바닥은 사실 상상을 불허하는 스펙터클 어드벤처일 것이므로 예측조차 하기 무척이나 어렵다.

민주당의 뻘짓과 지향점 없는 목표와 무능력과 존재감 없는 무게는 아직 밑바닥을 보지 못했다. 지금이 바닥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학규씨, 정동영씨에게 구걸을 하는 수순도 아직 거치지 않았다. 이들의 밑바닥은 아직 한참 멀었다.

민노당이 교조적 예술진보라는 공구리를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밑바닥을 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보다 박근혜씨가 스스로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치며 나서는 걸 기대하는 편이 훨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임계점.

이번엔 기어코 밑바닥을 봐야 하겠다고 눈 질끈 감고 때를 기다리는 공화국의 시민들.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수천만 시민이 모두가 스스로 지휘권을 갖고 임계점을 기다리는 일. 전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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