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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소통

발광할 때와 뒈질 때 - 서프 내과의사님

홍준표가 고생이 많다. '노짱'의 봉하마을 사저를 일컬어 '아방궁' 운운한 모양이다. 홍씨는 정말 진시황의 아방궁에 가 보았을까? 안 가봤으면 애초에 아방궁 비유를 하지 마라. 최소한 홍씨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만큼은 '달인'이라 자부하는 내가 충고한다.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는데 겪어 보니 우리 옆집 강아지가 홍씨보다 훨씬 '인간적인 것' 같다.)

영삼이네는 차들 댈 곳도 없다고 홍씨는 푸념한다. 홍씨는 아직도 '치매 영삼'에게 인사갈 의리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주차장 없으면 지하철에 마을버스 갈아타고 가라. 꼭 차 끌고 인사가고 싶거들랑 영삼이에게 서울을 떠나라고 해라. 나도 서울 강북에 전세살이하는 인생인데 전세비 빼서 탈서울 하면 지방 도시에 웬만한 아파트 하나 살 돈은 된다더라. 영삼이네 상도동 집 팔고 부산만 기어내려 가도 주차장 빵빵한 집 하나 장만할 걸? 아님 말구.

홍씨뿐만 아니다. 조중동, 한나라당이 모두 떨치고 일어나 참여정부와 노짱에게 악다구니를 부리느라 이성을 전당포에 저렴하게 저당 잡힌 상태이다. 이건 마치 그네들의 정신적 지주인 일본 아이들의 '만세 돌격'을 보는 기분마저 든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데 왜 멀쩡한 바닥에 비닐 깔고, 똥물 뿌리고, 그 위에 자빠져 단체로 죽죽 미끄럼질 하는 엽기 퍼포먼스를 보여줄까?

레마르크 원작 소설인 '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는 1950년대 영화가 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2차 대전에 휘말린 평범한 독일 청년의 종군과 사랑과 죽음을 그린 영화이다. 주인공의 동창 중 학생 때 건달이었다가 나찌당의 '가우라이터'(지구당 위원장쯤 될 거다.) 감투를 쓰고 거들먹거리는 친구가 나온다. 전시라 모든 물자가 궁핍한데 그 친구는 휴가 나온 주인공에게 그야말로 주지육림의 푸짐한 향연을 베푼다. 그리고 주인공과 그의 애인을 위해 어느 정도 '빽'을 써주기도 한다.

나찌당의 가우라이터와 평범한 일개 병사인 주인공. 누가 봐도 하늘과 땅만큼 격이 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가우라이터 친구는 주인공을 부러워한다. 국가의 명운을 건 전시 상황(비록 명분 없는 침략 전쟁이지만). 가우라이터라고 해도 빛 좋은 개살구일 뿐, 실제 전장에서 피와 땀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주인공에 비해서 후방에서 완장이나 차고 뻐기고 다니는 자신은 너무도 초라하다는 열등감 때문에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주인공에게 호의를 베풀며, 전쟁 영웅급도 안 되는 주인공의 초라한 전공을 간접적으로나마 공유하려 한다. (한마디로 '묻어가려는' 심보이다.)

전황이 독일에 불리하게 돌아가며, 독일의 패전이 가시화되자, 가우라이터는 여자들 불러놓고 밤새도록 질퍽한 술판을 벌이는 것으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낸다. 자신의 출세에 확실한 보증수표라 여겨 화끈하게 나찌당에 줄을 섰건만, 다가오는 것은 암담한 몰락일 뿐, 가우라이터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가 처음에는 강렬한 부정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도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결코 자신이 흘린 피와 땀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헌신이다. 그네들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로,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그 어떤 희생도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그들 자신이 더 잘 안다. 삼복더위 때 보신탕으로 변신할 우리 옆집 강아지가 조중동과 한나라당보다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더욱 가치가 있다는 명제는 보신탕집 주인이 아니더라도 알고 있는 국민 모두의 상식이다.

조중동과 한나라당 자신의 터진 입으로 붕괴된 경제라 칭했던 참여정부의 경제. 자칭 ;경제 살리기 전문가;와 그의 패밀리가 화끈하게 가지고 놀았던 오늘의 경제. 어떤 경제가 죽은 경제고 어떤 경제가 살아있는 경제인가. 과연 누가 사기꾼이고, 누가 거짓말쟁이인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 답이 국민 상식이 된 지도 시간이 한참 지났다. 조중동과 한나라당도 그 답을 알고 있다. 다만, 인정하지 못하는 패닉상태에 젖어있을 뿐.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악다구니 합창의 참모습은 참여정부와 노짱에 대한 극렬한 열등감의 배설과 현실 부정과 현실 도피의 발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저들은 헌신하고 싶어도, 희생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정신적 불구자들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시행착오와 부조리를 당당하게 인정하고, 참회하고, 진정으로 용서를 구할 용기도 없는 가련한 비겁자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저들이기에 오늘처럼 집단으로 발광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도, 할 줄 아는 일도 없는 종자들이다.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마지막 장면이 애잔하게 떠오른다. 사랑하는 아내의 편지를 읽다가 총에 맞아 쓰러지며 마지막까지 강물에 떠가는 편지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주인공의 모습. 아마도 한나라당과 이명박은 발광 끝에 뒈질 때까지도 그네들의 영원한 애인 조중동 휴지 쪼가리를 부여잡고 의아해 할 것이다.

"이런 된장, 조중동에는 우리가 잘나간다고 쓰여 있는데……?"


이런 된장, 오늘은 글 쓰다 보니 아름다운 명화 한편의 추억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