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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소통

'경계'를 만드는 것은 '언어'이다.

어렸을 적 그림그리기를 참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흑백으로 또는 칼라로 그려내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재미있기도 했다. 늘 그리던 것은 미래의 우리집, 미래의 우리집 평면도, 영화나 만화에서 보았던 전투장면, 여러 가지 동물들, 로봇, 비행기, 전차 등등이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림을 비교적 잘 그리는 편에 속했었다. 초등학교 때는 교실 뒤편 작품란에 수시로 내 그림이 걸리기도 했고, 반공 포스터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가끔 몇몇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억지로 그리다보면 모자라긴 하지만 그럭저럭 엇비슷하게 흉내를 낼 수는 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인가, 뭔가 한계를 느끼면서 그림이란 게 정말 어려운 것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아그리파를 뎃생한 시간이 있었는데, 눈 앞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데 왜 그리 어려운지. 얼마 뒤에는 쥴리앙을 그리게 되었는데, 이건 아그리파에 비할 수 없이 더 어려웠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지금까지 내가 그리기 좋아 했던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내 머리 속으로 상상해낸 것들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 특히 쥴리앙 같은 석고상 얼굴이나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정물화도 그랬고, 풍경화 역시 그랬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상상으로 그리는 것은 재미 있고 쉬운데, 왜 눈에 뻔히 보이는 것들이 더 그리기 어렵고 재미도 없었을까?

어렴풋이 드는 느낌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니 그 해답은 ‘경계’였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하면 사물과 사물을 구분 짓는, 또는 어떠한 부분과 부분을 나누게 되는 ‘경계선’이란 것 때문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장 그리기 힘들었던 것이 사람의 얼굴. 얼굴에는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고, 이마가 있고, 뺨이 있고, 턱이 있고, 얼굴 윤곽이 있고, 귀도 있고, 머리카락도 있고, 미세한 주름이나 점들도 있다. 우리의 언어로는 이렇게 얼굴의 부분 부분을 세밀히 나누어서 명칭을 붙이고, 또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고 정리할 수가 있다. 하지만 정작 코와 뺨의 경계를 어디로 할 것인지, 턱과 목의 경계는 어디로 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이건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구분 할 수 없이 이어진 부분을 명암으로 구분을 지어 표현을 하는 것이 그림인데, 나로서는 구분할 수 없는 것을 구분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나 보다.

비단 사람의 얼굴 뿐만이 아니라 자연의 모습이나 꽃병에 담긴 꽃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초록으로 덮인 산이나 숲의 모습은 한 덩어리로 보면 그냥 초록이지만, 거기에는 수많은 다른 초록들이 섞여 있다. 꽃의 모습, 나무의 모습, 풀의 모습도 모두 하나의 초록이라고 볼 수 없는 수많은 초록들이 섞여 있는데, 그것을 몇 가지의 초록으로 비슷하게 나타내고, 더구나 색의 구분을 지어 표현해야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서 분명한 경계를 그어야만 하는 것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첫 인상이 어떠하다’란 말부터 ‘뒷맛이 어떠어떠하다’란 말까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결정 짓고, 명확히 줄을 그어야만 대상을 제대로 파악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산다.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구분되어야 하고,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명확히 나누어져야 제대로 된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것은 어떠해야 하고, 저떤 것은 저떠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고정관념이란 것이다. 선입견이란 것이다. 다르다는 말보다는 틀리다는 말을 훨씬 더 쉽게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언어’라는 것이 만들어낸 문제이다. ‘언어’의 특징이 연속적인 것을 불연속적인 것으로 나누어서 표현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과 낮, 낮과 저녁, 저녁과 밤, 밤과 새벽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정확히 햇빛의 밝기가 몇 룩스부터 몇 룩스까지는 아침 혹은 낮이라고 구분할 수는 없다. 어둠의 정도가 어느 정도 되어야 저녁 혹은 밤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도 우리는 그 시간들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긍정적인 관계와 부정적인 관계 또한 이렇게 구분 짓는 사람들의 특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거나, 사람과 사람을 나누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의 힘이나 사람 머리 속의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바로 ‘언어’의 힘이 아닐까? 상대방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그 사람에 대해 좋았던 경험 또는 좋지 않았던 경험만으로 그 사람을 단정지어버리는 것이다. 바로 사람이 만들어낸 ‘언어’로.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해 또다시 ‘언어’로 포장을 한다. ‘베짱이 맞다, 마음이 잘 통한다, 같은 경험이 있다’ 등등. 좋은 관계가 종점을 향해 치달을 때도 역시 이 포장지의 위력은 여전하다. ‘당분간 따로 지내보기로 했다, 서로의 길을 인정하기로 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등등.

나는 지금도 사람에 대해, 또는 어떤 사건에 대해, 또는 어떤 물건에 대해 나의 생각을 물어보면 명확히 답을 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이야기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로 인해 결정되어져 버릴 어떤 대상에 대해 나는 내 언어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딱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건 단지 그 사람의 착각일 뿐이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그 사람의 욕심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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