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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소통

오바마의 당선에서 희망을 보는가 - 서프 초모룽마님

1963.11.22일, 댈러스를 방문 중이던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백주대낮에 암살된다. '범인' 오스왈도는 당국에 의해 서둘러 체포됐고, 그마저 이틀 후 경찰들이 보는 앞에서 피살된다. 우연치고는 심상찮다. 당연히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이 유명한 사건은, 대개 알려져 있는 것처럼, 오스왈도의 '개인적' 단독 범행인가, 아니면 소련이나 쿠바의 '빨갱이들'이 사주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미국의 핵심 권력층(편하게 '당국'이라 부르자)이 '만들어낸' 것인가? 그것에 답해 줄 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는 국가기밀로 분류돼 공개되지 않고 있다.

올리버 스톤은 영화 <JFK>에서 '당국'이 케네디 암살 배후에 있다고 본다. 오스왈도 말고 진짜 '저격수들'은 따로 있었다는 얘기다. 이 시나리오가 맞는다면, 케네디 암살 이유는 분명하다. 케네디가 당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케네디가 제 분수도 모르고, 베트남 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 등등에서 '그렇게 해야만 하도록' 프로그램화된 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케네디를 살해함으로써 당국이 얻은 것을 따져보면 그게 충분히 가능한 짓이라는 게 드러난다.

당국은, 맘에 안 들면 대통령이라도 없앨 수 있다는 것을, 그것도 신중히 연출하여 백주대낮에 생생히 눈으로 보여줌으로써 앞으로의 대통령들(국민들)에게 확실히 경고했다. 만에 하나 자신들의 존재가 폭로될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이 극적인 장면으로 당국은 뜻하지 않은(?) 효과를 보게 된다. 케네디가 '미국과 미국 민주주의를 위해 영웅적으로 희생되었다'는 신화 비슷한 이야기가 알 듯 모를 듯 선전됨으로써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아우라가 보태진 것이다.

이 아우라 때문에, 선출되지 않는 '영원한 권력', 당국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사히 은폐될 수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그러한 영웅적인 모습의 대통령을 자신들이 직접 선택한다는 것에 새삼 감동 먹은 나머지, 자신들이 미국의 진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 진짜 민주주의를 한다는 - 착각에 빠지게 된 것이다. 9·11 이후의 광적인 애국주의 물결을 보면, 케네디의 암살에 미국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가령,

'케네디가 미국을 위해 비극적으로 죽어나갔다……. 이럴 때일수록 단결하여, 미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보여주자!'

사실 조작은 대개 이렇게 행해진다. 조작이 작동한 결과, 미국인들은 실제 권력이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았듯이) 현직 대통령 정도는 우습지 않게 해치워버릴 수 있는 저쪽 '당국'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호르헤 보르헤스는 케네디를 맞춘 총알이 "낯설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또? 맞다. 링컨도 그 총알에 비명횡사했다. 말콤 X, 루터 킹도 그 총알에 맞았다. (케네디나 링컨은 현재 오바마와 곧잘 비교되는 인물들이고 말콤 X나 킹 목사는 흑인운동가들이니 오바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것도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가?)

2천 년 전 그 총알을 대신하는 것은 못이었다. 케네디가 총을 맞아 역설적으로 후광을 얻었듯이, 손에 못질을 당함으로써 엄청난 아우라를 얻은 사람도 있다. '평범한 유대인 랍비이자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예언자에 불과했던' 예수는 (다른 죄수 2명과 함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짐으로써 불후의 명성 - 인간을 대신해 속죄했다는 - 을 얻게 된다.

케네디는 미국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예수는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희생됐다! 문제는, 예수나 케네디가 희생됨으로써 (그리고 인류와 미국 민주주의를 위해 영웅적으로 희생됐다고 알려지게 됨으로써), 정작 득을 본 사람은 따로 있으며 중요한 진실도 은폐되었다는 사실이다.

거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소박한 삶을 즐겼던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자를 사랑했던') 매우 '인간적'인 예수를 '신격화' 함으로써 득을 본(권력을 얻은) 사람들은, 예수가 아니라 그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의 제자들인 교황들과 성직자들이었다.

교회권력이 예수를 팔아 쌓아올린 권력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자 할수록, 예수를 독점하고 신격화, 영웅시할 이유는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신자들은 "신은 무조건적인 믿음의 대상이지 (인간 예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당국에는 대통령이 그들을 위해 일할 '훌륭한(?) 자질'을 가지면 가질수록, 국민들에게는 영웅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좋다. 그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지만 (막연하게) 희망을 가지게 하고, 미국 민주주의가 죽지 않았음을 (맹목적으로) 믿게 할 수 있으면 좋다.

레이건은 그런 영웅이다. 3류 배우 출신이 미국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궤적들… 후임인 아버지 부시와 함께 레이건은 당시 유행하던 <람보>처럼 다분히 미국적인 근육질 영웅을 대표한다.

케네디와 클린턴은 또 다른 미국적 영웅상이다. 지적이고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 이렇게 미국을 영원히 젊게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도회풍의 이미지와, 힘센 미국을 상징하는 근육질의 대통령이 번갈아 나타날 때마다 미국인들은 '새삼' 희망을 가져 본다. 새 인물이 나올 때마다 성조기가 뒤덮이고 '아메리칸 드림'이 되살아난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더 나아지리라, 좋아지리라 믿어 본다.

텍사스 카우보이 아들 부시가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도 미국사람들은 기대가 컸을 것이다. 특히 그는 희미해져 가는 미국의 영광을 되찾아야 하는 영웅이 되어야 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9.11 직후 부시에게서 '영웅의 모습' - 헤겔이 말을 탄 나폴레옹에서 발견한 - 을 발견했다. 9.11은 치욕이 아니라, 미국의 위대함을 보여줘야 하는 계기가 되어야 했다. 하여 부시한테는 전설적인 영웅에나 주어졌을 법한 전권이 부여되었다. 프랑스의 르몽드가 외쳤던 것처럼 세계는 "우리는 모두 미국이 되어야 한다"면서 부시의 행동에 이목을 집중했다.

부시는, 이에 부응하듯, '이라크 승전' 선언을 위해 전투기를 타고 항공모함에 산뜻하게 내려앉는 장관을 연출했다. 이 잊히지 못하는 장면은 물론 테러리즘으로부터 '세계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영웅적' 미국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부시가 용도 폐기된 것은, 이제는 늙고 지친 부시에게서는 영웅의 모습을 더 이상 연출할 수 없기 때문이거나, 또는 부시가 (말년에 업적이라도 하나 건질 요량으로) 갑자기 약(?)해진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갱제까지 말아먹은 상황이라면, 그동안 '위대한 미국' 뒤에 숨었던 진짜 모습이 까발려 질 수 있다. 미국은 부시류 말고, 최신 영웅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자동차나 휴대폰처럼 멋진 최신모델을 갖게 되면 행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물론 이 행복은 대체로 오지 않는다." 그러나 "좀 더 나은 모델이 나오면 행복해지겠지"라며 행복을 기다리는 그 작업을 다시 반복한다. 행복의 은총은 마치 (영웅의 행적인)기적처럼 나타나는 것으로 인식된다. 새 대통령이 뽑힐 때마다 아메리카 찬가가 울려 퍼진다. TV 광고나 드라마에 나오는 풍요의 기적이 곧 쏟아지리라!

그들 앞에, 젊고 잘 배웠고 당당하고 자신감 있어 뵈는, 더구나 '흑인'이어서 매우 입지전적이기도 한, 인물이 나타났다. 오마바다. 그는 당선되자마자 이미 영웅이 되었다. 그의 등장에 함께, 미국식 '풀뿌리 민주주의' 등 예찬론이 넘쳐흐른다. 그는, 미국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그럼으로 해서 미국의 실상을 은폐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다.

벌써부터 미국사람들이, 아니 세계는 잊어가고 있다. 그것은 분명 은폐다. 불과 엊그제만 해도 미국은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나라였다. 꼭 부시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은 시스템적으로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것은 분명 부시 때문이다)이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 월가가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처지(이것은 부시 때문이 아니라 분명 그동안의 누적적, 구조적 모순의 결과다)로 전락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미국은 국제무대에서도 왕따당하고 있었다. 이것도 흔히 말하듯 부시의 일방주의 때문이 아니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고전 - 부시가 아니라 그 누가 오던 고전하게 되어 있다 - 하는 것을 사람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이렇듯 힘을 잃어가기 때문에 '동맹국들'조차 말을 안 듣는 것이다.

근데, 오바마가 당선되자마자 늙은 미국이 곧바로 회춘한 양 떠들썩하다. 온통 장밋빛이다. 풀뿌리 민주주의, 인권이 철저히 보장되고 약자가 보호받는 사회, 오바마 당선에서 보듯 인종 차별 없는 국가, 아메리칸 드림… 이런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일그러진 미국은 온데간데없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마냥 축제다. 디즈니랜드처럼 환상적인 미국!

지난 8년 동안 미국의 진짜 모습이 그렇게도 드러났건만 - 그것은 절대 부시 탓이 아니다. 구조적 쇠퇴에 들어선(인공호흡기를 달지 않으면 몇 달 못 가게 된 자동차 산업을 보라!) 미국이 부시를 앞세워 마지막 발버둥을 친 것에 불과하다 - 또 잊어버릴, 아니면 애써 눈감을 참이다.

오마바의 당선에서 희망을 보는가. 오마바에 오버하는 미국을 보고 '저러고 싶을까?' 하는 느낌이 먼저 들지는 않나. 정권 한번 바뀌었다고 요란 떤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이 에렵다는 것의 반증이다. 옛날의 영광을 그리워한다는 얘기다. 예전처럼 잘 나가고 있다면, 저렇게 호들갑일 리가 없다. 미국이 진정 시스템적인 민주국가이고, 잘 나가고 있다면 부시와 같은 어리버리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실패는 없어야 하고 오바마의 등장에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드골이 '위대한 프랑스!'를 외쳤다는 것은 당시 프랑스가 전혀 위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왜 그리 호들갑인가! 한국은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아무렇지 않게 해냈으면서도, 남아공은 만델라가 백인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해냈지만 저렇게 오버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대통령이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것은, 케네디 암살부터 9.11까지 제 꼴리는 대로 해석하고 자기들 의도한 판으로 이끌어가려는 권력, 특히 미디어의 조작 때문이다. 당국과 미디어가 장사해 먹으려고 오버를 조장하고 권장한다.

부시의 실패에서 미국의 실패가 보이듯 오바마의 등장에서도 미국의 실패가 보인다. 흑인(절대 인종적 편견으로 얘기하는 게 아니다)이 대통령 됐다는 것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그만큼 미국이 급하다는 뜻이다. 백인 주류계에서는 이제 미국을 크게 보고 혜안으로 이끌 인물이 없는 것인가. 아무튼,

미국 미디어는 유난히 영웅들(빅맥과 배리본즈의 대결을 보면 잘 알 수 있다)을 만들어내는 데 열을 올린다. 미국은 유달리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다. 미국의 실패가 '부시로 인한 실패'로 해석되고 오마바가 등장하여 그 실패를 거뜬히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이를 방증한다. 문제는, 영웅이 강조되면 다른 면은 애써 잊혀진다. 오바마의 등장과 함께 부시가 물려준 구조적인 미국의 문제점은 금세 잊혀졌다.

귄터 안더스는 매체를 통한 정치적 조작이 이제는 거의 '완벽'에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조작은 카메라(미디어)로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사건은, 그것이 카메라에 찍혀야 비로소 발생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사건이 카메라에 복제될 때 비로소 사회적 중요성을 띄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카메라가 현실을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거꾸로 현실이 카메라를 쫓아다니며 그 앞에서 자신을 연출하게 된다. 진중권은 조선일보가 "사건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 보도를 사건한다"고 이 같은 상황을 요약한다.

조중동이 지난 대선에서 국민들에게 사건화한 것은, (묻지 마) '기대'였다. 이명박이 되면 아파트 값이 올라가고 등록금 반값으로 줄어들고… 뉴타운에 들어갈 수 있고 잘만하면 강남 못지않게 살 수 있다… 그러니, 그렇게 되고 싶다면, 이명박의 비틀린 행적들, 차떼기, 구제금융시절, 성추행도 잊어라….

왜 자꾸 한국 상황과 오바마에 오버하는 미국이 오버랩될까? 미국 대통령이 된 것은 오바마의 개인적 영광인 것은 틀림없지만, 미국과 그리고 세계가 기대해도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