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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소통

심상정을 찾지 않고 노무현을 외치다 - 초모룽마

심상정을 찾지 않고 노무현을 외치다
(서프라이즈 / 초모룽마 / 208-11-23)


1.

"진리는 그 자체로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로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진리가 된다."

푸코의 이 같은 주장은 지식과 권력과의 관계를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즉, 진리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지식권력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예를 들면, 정신이상자(?)에 대한 정신과의사의 권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성에게 광기는 낯설고 불편한 존재다. 따라서 이성이 힘을 얻는 시대에는 광기는 억압되기 마련이다. 이 억압의 메커니즘을 통해 지식권력이 만들어진다.

중세에 광기는 인간 경험에 통합된 일부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광기는 어떤 진리나 특수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특이하게 현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때 광기는 이성과 공존이 가능하다.

'계몽'이 득세하면서 광기는 침묵을 강요당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격리되었다. 광기는 '무질서', '부적응'과 동의어가 되는데, 대부분 새로 등장한 자본주의적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어지럽히는 자들이 감금되어 강제 노동으로 다스려졌다.

근대 후반, 이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치료법이 개발되면서, 즉 광기가 '질병' 개념으로 바뀌면서(수용소가 정신병원이 되면서) 마침내 일단의 신 지식계급이 등장한다. 바로 '정신과의사'들이다. 정신병리학 담론 체계 내에서 '광기'를 치료할 수 있는 - 진리를 말할 수 있는 - 유일무이한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의사는 '권위'를 통해 환자에게 '정상적인 질서와 가치'를 가르친다.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 주체는 오직 의사뿐이고, (할 말이 많을 것이 분명한) 환자는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의 '진리(?)'도 무시된다.

지식은 이 관계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경계선을 유지하는 기술자들에게 '의사'란 직책을 주고 '과학'이란 엄숙한 딱지도 붙인다. 지식권력은 대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진리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라는 것이 입증됐다.


2.

보르헤스의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 따르면 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a) 황제에 속하는 동물, b) 향료로 처리하여 박제로 보존된 동물, c) 사육동물, d) 젖을 빠는 돼지, e) 인어, f) 전설 속의 동물, g) 주인 없는 개, h) 현재의 분류 안에 포함된 것, i) 광폭한 동물, k) 셀 수 없는 동물, i) 그 밖의 동물, m) 물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n) 멀리 떨어져 보면 파리처럼 보이는 것…

이것과, 현대 서구식 ('과학적') 동식물 분류체계인 린네의 '종-속-과-목-강-문-계' 중 어느 것이 진리인가.

인도 식민지의 영국 관리들과 그에 복무하는 지식인들은 인도의 동식물계를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그 정보들을 서구식 체계로 분류해냈다. 그렇다면, 이 정보는 그 자체로서 진리인가 아니면, 그것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영국의 지식계급이 만들어낸 정보라서 진리인 것인가?

영국의 지식권력은 인도사람들을 지식의 생산 '대상'(조사 또는 연구의 대상)으로만 본다. 이렇게 주변화되고 소외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지식의 반복적 생산행위는 현재의 권력관계를 유지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데 아주 필수적이다.

실제로, 지식인들은 보통 '흑인'을 대상으로 문제를 연구하지 지배계급인 '백인'은 다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아닌 '여자', 중간계급 대신 '노동계급'이 지식인들의 주요 지식생산 대상이다.

(노동계급에 특히 '관심 많은' 민노류는 노동공동체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연구하는 그 노동자들을 '대상'화 한다. 이것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권력관계가 만들어진다. '노동귀족'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3.

지배적 담론의 위치를 차지한 지식권력(조중동에 글을 파는 지식인들, 식민관계를 재생산해내는 영국 지식인들)은 그와 비슷한 힘을 가질 수도 있는 대체 담론(길거리의 촛불들, 아고라의 미네르바들 또는 '중국 백과사전'들)을 철저히 배제하거나 공격함으로써 그 지식 권위를 지켜내게 된다.

지배담론의 위치를 차지한 진리는 신문으로 인쇄되어 사회에 유포되고 교육과정에 포함되며 끊임없이 논평 되어… 결국 '상식'이 된다. 반면 지배담론에 의해 '거짓'으로 분류된 것은 재생산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령, 조중동의, "촛불이 아무리 명분 좋아도 거리로 나오면 불법 폭력이다"는 말에 사회는 어느덧 간단히 동의해 버리게 된다. 이것과 다른 것 같지만 실상 아주 똑같은 말을 (조중동의 반대편에 있는) 진보들의 입에서도 곧잘 들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최장집이다. "촛불은 직접 민주주의의 희망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제 '대의민주주의'에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자"

지식인들(좌우가 따로 없다)은, 진리는 자신들과 같은 권위자들과 전문가들에 의해서만 생산되어야 한다고 우긴다. 다시 말하면, 누가 말할 자격이 있고 없는지를, 어떤 담론이 공인받고 받지 못하는지를 구별하는 것, 이게 지식권력이 작동하는 핵심 원리다.

'민주주의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 같은 고담준론은 제한된 특정집단 - 공인된 지식인들과 엘리트 관료들 - 에 의해서만 엄격하게 말해져야 한다!'


4.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촛불 민주주의 담론이나 미네르바의 경제담론은 지식권력의 행사를 방해하고 저항하는 지점이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고, 자격도 불분명할 뿐 아니라 주변화된 이런 사람들에 의해 어떤 지식이나 담론이 주도적으로 생산되는 경우, 즉 기존 권력질서가 금기로 간주했던 그런 종류의 정보들을 생산해내는 경우(이들의 특성상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동안 잘 작동되어왔던 지배담론 생산체계의 본질이 폭로되고 그 작동 방식마저 무력화된다.

(촛불은, '절차' 민주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제기하지 못한 말을 꺼내 들었다. 귀 닫은 정부는 퇴출시킬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대의민주주의를 전공한 최장집에게 '정권퇴진'이라는 용어는 터부다. 미네르바가 역시 금기를 깨고 엄숙한 갱제당국과 '보이지 않는 손'의 신뢰성을 까발렸다.)

이것은 기존 권력질서를 흔들 뿐 아니라 사회체계를 통째로 바꾸는 거대한 힘이 될 수 있다. 통제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식권력들에는 대안 담론이 지니는 이 무시 못할 위력을 배제하거나 억압해야 할 일종의 의무감이라는 게 있다. 촛불을 끄기 위해 조중동 뿐만 아니라 최장집까지 나서고, 미네르바 때문에 거대한 '정보당국'까지 나선 이유가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노무현 때 '경제가 망해간다.'라며 떠들어댔던 그 많던 갱제학자들이 'MB노믹스'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입 다물고 있는 이유도 분명하다. 그 '학자'들은 미네르바들을 무시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또 현재의 경제위기 원인을 '글로벌'에 돌림으로써 (그렇게 하여, 노무현 경제에 대한 자신들의 평가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쪽팔림도 면하면서)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한다.

물론 이것은 대안 담론에 대한 위기의식의 반영이다. <디워> 논쟁을 보라. 네티즌의 대안 평론에 기존의 '공인된' 직업평론가들이 어떻게 반응했던가.


5.

담론은 또 일련의 '규칙들'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 가령, 대학생들은 (누가 강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학술적'인 규칙에 따라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운다. '사회적 관행'을 통과한 것들만이 진리로 인정되는 것이다.

어떤 지식인이 학문의 관행을 벗어나서 발언하게 되면 진리로 취급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 '미친놈' 취급 받기 쉽다. '지식 대중화'를 감히 선언한 김용옥에 대해 지식인 집단이 어찌 대했는지 보라. 이성과 광기의 언어를 엄격하게 구분하길 좋아하는 그들에게 김용옥의 언어는 흔히 광기로 치부된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이나 거리 촛불들의 언어들 역시 '괴담'이라고 취급해버린다.

이 규칙과 관행들이 (촛불과 미네르바를 통해) 2008년에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조중동 담론은 전복의 징후까지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예의 조중동, 이명박뿐 아니라, 심상정까지 모두 나서 퇴임 열 달이 다 되어가는 대통령을 아직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노무현은 기존의 지배담론이나 지식권력에는 거대한 위협이었다. 조중동, 이명박, 심상정, 성한용들에게 노무현은, 말하자면, '진리'를 말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그들에게 노무현은 주변화된 인물이다.

이들이 예나 저나 노무현에 대해 끊임없이 글을 쓰고 말을 해대는 이유는 노무현을 '대상'화함으로써 - 영국이 인도를 대상화하고, 직업평론가들이 (영화가 아닌) 네티즌 '평론가'를 대상화하며, '학자'들이 김용옥(의 학문이 아닌 스타일)을 대상화하듯이 - 기존 (지식) 권력질서가 엄연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누구에게 확인시키는가? 노무현에 한때 열광했고 지금도 열광하고 있거나 또는 (이명박의 뻘짓 때문에 새삼 노무현에) 열광하게 될 평범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노무현은 대상에 불과해, 그래도 좋아할래?'

헌데 그 '대상'으로만 머물러야 할 노무현이 감히' 담론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거다. 전혀 '정통적' 지식인에 속하지 않는 노무현은 '진리를 말할 위치'에 있지 않은 데 말이다. 노무현은 일련의 엄격한 '관행들'에 의해 통제받기를 거부했는데도 말이다. 노무현은 일찌감치 레임덕 됐다고 믿었는데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일보의 검증을 거쳐야(또는 이름 한 줄 걸쳐야) 비로소 지식권력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심상정 같은 자칭 '정통' 진보류들에게 진보는 자신들만이 독점해야 할 그 무엇이다. 나름대로 투쟁도 하고 장사도 하여 진보 전문가요 권위자가 됐는데 그 질서를 노무현이 무참히 깨트리니 미칠 노릇 아닌가. 노무현은 푸코의 말처럼 "지배적 진리(권위)를 의심하라." 하면서 그것을 깼다.

이명박이 삽질하는 지금, 사람들은 진보신당이나 심상정을 찾지 않고(당연하게도 찾아야 하는데!) 뜬금없이 노무현을 외친다! 심상정이 요즘 똥줄 타는 이유는 바로 요거다.

 

ⓒ 초모룽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