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과의 소통

진보가 쫄딱 망한 이유 - 1 - 초모룽마님

'노무현 죽이기', 한겨레와 경향이 더 광분하는 까닭
(서프라이즈 / 초모룽마 / 2009-05-02)


진보는 쫄딱 망했다. 스스로 ‘진보’라 자칭하는 자들이 하는 말하니 분명 망했을 게다. 이명박이 죽을 쒀도, ‘노무현 탓’ 해봐도 지지율은 오를 기미가 없고 대안 세력으로는 전혀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마치 자기들만의 것인 양 자랑하던 ‘촛불’에 대한 1주년 평가도 자못 자학적이다. 진보신문들의 경영난까지 겹친다. ‘거 참, 이상하네. 왜 올해는 촛불이 켜지지 않지?’...‘우리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여기저기 나오느니 한숨뿐이다.

필자가 알기로, 변증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진보란 ‘운동과 변화’에서 그 발전의 싹이나 희망을 보는 것일 텐데, 어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서 망했으니 뭐했느니 자책하거나 시니컬해지는 꼴을 보면, 저들은 분명 진보라는 개념에 대해 어떤 도그마를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진보는 망했다. 그리고 무능하기까지 하다. 대표적 진보의 하나인 손호철이 오늘 “대중(촛불)은 언제 움직이고 언제 침묵하는가? 대중을 움직이려면 우리(진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회과학을 직업으로 살아왔으면서도 이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자인하지 않았는가. 쯧쯧.

그렇다면, 저들 결벽증 환자들이 굳이 ‘자유주의적 개혁’ 세력이라며 따로 취급하는 우리, 즉 노무현의 비판적 정신을 지지하는 우리가, 저들이 말하는 진보의 실체가 무엇이고, 그들만의 진보는 왜 망했으며 무능하기까지 한가에 대해서 분석해 보는 것은 어떨까?

사실, (저 사람들이 아닌) 우리들이 진정한 의미의 진짜 진보들인지도 모르고(한번 의심해 봐야 할 것은, 어떤 세력이 유달리 ‘진보! 진보!’를 강조하는 것은 실제로는 그들이 진짜 진보가 아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 진짜 진보들은 멀쩡하게 살아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촛불 때 필자가 직접 겪는 실화, 에피소드로부터 시작하자. 촛불이 점차 수그러지던 무렵 어느 날 밤 청계광장에서 예의 거리 행진에 나설 즈음 사람들은 광장의 출입구란 출입구는 어느새 견찰들이 모두 봉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개 같은 놈들! 촛불들은 졸지에 비좁은 청계광장에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된다.

필자는 종로 쪽으로 빠지는 길을 막고 있는 견찰들 바로 앞에서 촛불을 들고 있었는데....여기서 이 포위망을 개별적으로 뚫어보고자 시도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지켜볼 수 있었다. 숱한 사람들이 벽을 뚫고 자유통행권을 얻기 위해 호소도 해보고 고함도 쳐보고 욕도 해보지만 견찰은 요지부동이다. 첫 번째로 평범한 촛불들.

촛불 : “이렇게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도 되는 겁니까. 좀 비켜주세요.”
견찰 : “....”
촛불 : “나는 지금 집에 가려는 것이니 걱정 말고 보내주시오”
견찰 : “....”
촛불 : (조금 흥분해서) “당신들이 해산하라고 해서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니깐!”
견찰 : “....”

결국 촛불들은 포기하고 돌아선다. 어떤 촛불은 애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화장실이 급해서 내보내 달라고 하지만 견찰이 이런 사정 봐줄 리 없다. 다음은 노인.

노인 : “나는 촛불이 아니네. 집이 이 근처라서 지나가는 길이니 좀 비켜주게”
견찰 : “....”
노인 : “힘없는 노인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막아서면 쓰나”
견찰 : “....”
주변촛불들 : (참다못해 항의한다) “어이, 견찰아자씨들. 어르신이 집에 가시는 길이라고 하잖아. 우리들은 여기서 꼼짝하지 않을 테니 노인들은 좀 보내주지?”
견찰 : “상부의 지시라서...”

실랑이가 한참이나 오간 뒤 결국 포기한 것은 노인 쪽. 영문도 모르고 포위망에 갇혀버린 주변의 상인, 데이트족 역시 마찬가지다. 줄줄이 퇴짜다.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도 있다. 다음에 등장한 사람들은 적십자 마크가 선명한 의료자원봉사단.

봉사단 : “저희들은 의료자원봉사단입니다. 길을 터주십시오. 급합니다”
견찰 : “....”
봉사단 : “저쪽 맞은편에 환자가 생겼다는 연락이 와서 가봐야 됩니다. 비켜주세요”
견찰 : “....”


(수차례 거듭된 자원봉사단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길을 터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촛불들이 이번엔 제대로 열 받는다.)

주변촛불들 : “우리 촛불들은 안 나갈 테니 이 자원봉사자들은 보내줘야 되는 것 아냐?...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돼? 전두환 때도 이러지 않았어!”
견찰 : “상부 방침이라서...”
주변촛불들 : “의료봉사단은 견찰들 당신들이 다쳤을 때도 도와주는 사람들인데, 진짜 니들 이럴래?”


주변 촛불들이 목소리가 높아지고 다른 촛불들도 험악한 표정으로 모여들자 당황했던지 아니면 ‘니들한테도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라는 말 때문인지 한참 밀고 당긴 끝에 마침내 견찰들이 봉사단에 길을 터준다.

이 의료단은 그때까지 유일하게 이 방어선을 돌파한 - 그것도 주변 촛불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어렵게 통과한 - 사람들이다. 그러나 단 몇 마디로 이 철벽같던 방어망을 유유히 빠져나간 사람이 있다. 맞춰보시라. 그게 누굴까?

기자 양반 나으리다. 이 기자는 처음부터 다른 평범한 촛불 또는 비 촛불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기자 : “야, 비켜. 나 기자야”
견찰 : “....”
기자 : “야 새끼들아, 빨리 비켜. 나 기자라니깐!”
견찰 : “(약간 당황하면서도) ....”
기자 : “이 새끼들이 진짜...내가 누군 줄 몰라? 기자라구 기자. 당장 안 비켜?”
견찰 : “(앞줄의 쫄다구 견찰 자꾸 뒤에 있는 ‘상부’를 돌아보면서도) 그게 저...”
기자 : “(기자증 꺼내 흔들면서) 진짜, 이 새끼들이 죽을라구 환장했나? 나 ×××일보(신문) 사회부 ××× 기자야!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정식으로 취재허가 받고 나왔어. 여기 책임자 새끼 누구야. 니들 오늘 다 죽었어”
견찰 : “(당황하는 기미가 역력)...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치 중입니다”
기자 : “당장 못 비켜!”
견찰 : (재빨리 길을 터주며) “통과하십시오”
기자 : (진작 그럴 것이지,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마디 더 한다) “에이, 그지같은 새끼들..”

기자는 견찰의 벽 사이로 유유히 사라지고 여전히 가도오도 못하는 촛불들은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기자가 실제로 견찰들을 다 죽여 놨는지 어떤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평범한 촛불들에게는 거대한 벽으로 느껴졌던 견찰의 그 두터운 포위망을 기자는 혼자 힘으로 가뿐하게 뚫었다는 점이다. 어떤 신문의 기자일까? 한겨레다.

그 기자가 큰소리치며 막말해댄 이유는 뭘까. 자기도 촛불 편이고 그래서 견찰들이 미워서? 그건 분명 아니다. 견찰 벽을 통과한 뒤에는 조용했으니까. 분명한 것은 그가 “기자”라는 점을 유난히 강조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내가 누군지 알어? 대통령 친구야”라면서 주사 부렸다는 좆선일보 모 기자가 오버랩된다.

기자는 다른 무슨 급한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특권’을 이용해 촛불들은 놔둔 채 자기 혼자만 빠져나갔다. 서울광장을 뺏기고 좁은 청계광장에 사방팔방으로 포위되어 언제 견찰들이 방패를 내리찍으며 촛불들에 달려들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자는 왜 밑도 끝도 없이 광장을 불법적으로 봉쇄했는지 견찰들에게 묻지도 않았고, 꼼짝없이 갇혀버린 촛불들과 애들과 노인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앞의 대화를 잘 새겨보면 그 기자가 견찰에게 요구한 것은 ‘취재의 자유’가 아니다. 그가 요구한 것은 기자로서의 ‘특권’이다. 어떤 특권? 일반 촛불들과 특별히 구별되어 대접받아야 할 특권, 가장 목 좋은 곳을 기자‘님’실로 특별히 배당받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취재원에 들락거릴 수 있는 특권, 큰소리치는 권력으로 대접받아야 할 특권, 삼류 소설을 써서 비열하게 보복하더라도 ‘언론자유’라는 미명아래 숨을 수 있는 그 성스러운 특권 말이다. 이 특권 요구에는 물론 좌, 우를 가리지 않는다.

‘진보’와 조중동 찌라시들이 연일 신나게 사이좋게 ‘노무현 죽이기’에 몰빵하는 것은 노무현이 그 특권을 해체시키려 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이다. 노무현은 조중동을 “찌라시”라 불러서 근엄한 밤의 대통령들을 혼비백산케 했다. 한겨레와 경향에는? 노무현은 그들만이 주장할 자격을 가져야 하는, 그렇게 할 때에만 그들의 권력이 유지되는, 진보적 가치의 독점을 와해시켰다.

노무현에 대한 반응은, 참여정부 말 콘크리트 바닥에서 기사를 작성하는 눈물의 장면을 연출하는 것에서부터, 조중동과 진보신문이 함께한 ‘언론탄압 저지’ 결의대회(한겨레는 속으로는 몰라도 대낮에 조중동과 함께한다는 것에 대해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인지 이 자리에는 빠졌다)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하다. 뭐, 그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지난 두 달간 봐왔던 광기 어린 노무현 죽이기이고.

글이 옆으로 샜는데, 이 글의 주제는 찌라시 아니고 앞서 말했듯이 진보는 왜 망했는가, 이다. 이 글에 수구들 얘기가 덩달아 나오는 이유는, 진보의 권력 유지방식이 수구들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물론 진보들이 망한 이유도 이 권력유지 방식으로 유래한다.

요점은 이거다. 좌우를 분명히 가르고 그것을 각각 독점하면서 권력을 유지한다. 그 구별, 그리고 독점하는 분야에 대한 주장(예 : 좆선의 ‘구국과 안보’)과 반대진영에 대한 섹시한 비판(예 : 한겨레의 ‘반 신자유주의’)이 더 화끈할수록 - 이것을 적대적 공생관계라 하나? - 그 권력은 강화된다.

그런데 그 굳건하고도 장사 잘되는 신성한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시 못할 세력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노무현과 굽힐 줄 모르는 강력한 지지자들이다. 더구나 그들은 공식으로 집권까지 했다!

이 노무현 현상을 무효화 하는 데 있어, 조중동과 한겨레?경향이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노무현을 진보로 묶어 노무현의 ‘부도덕함’을 이용, ‘부패하더라도 유능하기만 하면 된다’는 이명박류의 신화 굳히기를 시도하려 한다면, 한겨레?경향들은 노무현을 ‘진보 쪽’으로 분류하지 않고 따로 떼어 놓으면서 노무현의 ‘실패’를, ‘진보는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자찬에 써먹는 데 만족한다는 점이다.

좌우 모두 노무현 죽이기라는 목표는 같지만 - 아직도 노무현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에서 노무현의 등장이 그들에게 끼친 두려움의 정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 궁극적인 지향점은 이렇게 다르다. 물론 노무현이 ‘중도 진보’를 표방했기 때문에 더 충격을 받은 쪽은 진보들이다. 지금 한겨레와 경향이 조중동보다 노무현 죽이기에 더 신나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2부에서 계속한다. 오늘자 경향신문은 촛불 1년을 맞이하여 방귀깨나 뀐다는 진보들의 자기평가 즉, 넋두리를 종이에 도배했는데 그것을 잘 독해해내면 진보들이 왜 쫄딱 망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계속)

 

ⓒ 초모룽마